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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사건

크누트 대왕 치하 북유럽 제국

by gogoworld 2025.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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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누트 치하 그가 지배한 영토

 
크누트Cnut(990년 무렵~1035년 11월 12일)는 크누트(Canute)라는 별칭과 함께 대왕Great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1016년부터 잉글랜드 왕, 1018년부터 덴마크 왕, 그리고 1028년부터 1035년 사망할 때까지 노르웨이 왕이었다.

크누트 통치 아래 통합된 세 왕국을 역사가들은 북해 제국North Sea Empire이라고 부른다.

덴마크 왕자였던 크누트는 수 세기 동안 북서부 유럽에서 바이킹 활동이 이어지던 와중에 1016년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이후 1018년 그가 덴마크 왕위에 오르면서 잉글랜드와 덴마크 왕위가 통합되었다.

크누트는 덴마크인과 영국인을 부와 관습이라는 문화적 유대감으로 통합함으로써 이러한 권력 기반을 유지하려 했다.

스칸디나비아의 반대자들과 10년간 갈등 끝에 크누트는 1028년 트론헤임Trondheim에서 노르웨이 왕위를 주장했다.

1031년 스코틀랜드의 맬컴 2세 또한 그에게 복종했지만, 스코틀랜드에 대한 앵글로-노르드족 영향력은 약했고 결국 크누트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지 못했다.
 

13세기 후반 연대기에 보이는 크누트 대왕. 띨빵하게 생겼다.

 
잉글랜드 땅은 덴마크인들에게 그레이트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 사이의 해상 지대로 가는 중요한 연결 고리를 제공했다.

크누트는 그의 아버지처럼 이 지역에 강한 관심을 지니고 노르드-게일족Norse–Gaels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크누트는 잉글랜드 교구England's dioceses와 덴마크 대륙 교구continental Diocese of Denmark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신성 로마 제국 함부르크-브레멘 대교구Archdiocese of Hamburg-Bremen가 이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이는 기독교계 거물들 사이에서 큰 명성과 영향력의 원천이었다. (주교들의 팔리움pallium 가격[팔리움을 얻기 위해 여전히 여행해야 했지만]과 그의 백성들이 로마로 가는 길에 내야 한 통행료에 대한 중요한 양보를 얻었다.)

1026년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자 로마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신민들한테 쓴 편지에서 자신을 "모든 잉글랜드와 덴마크, 노르웨이인, 그리고 일부 스웨덴인의 왕"이라고 칭했다.

중세 역사가 노먼 캔터Norman Cantor는 그를 "앵글로색슨 역사상 가장 유능한 왕"이라고 불렀다.

그는 크누트 왕과 조수King Canute and the tide의 전설 속에서 널리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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