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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현장

바위를 뚫은 수미산 석굴

by gogoworld 2025.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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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불상은 99굴 미륵불이다.

 
이 수미산 석굴须弥山石窟은 난 아직 보지 못했다.

어쩌다 보니 연이 닿지 않았다. 

이 수미산석굴은 영하 회족 자치구 宁夏回族自治区 고원시固原市 원주구原州区 북서쪽 수미산에 위치하며, 북조北朝부터 당대까지 개착开凿된 석굴들을 총칭한다.

일부 석굴은 명청 시기에 개착되기도 했다.

주변에는 불교와 도교 사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훼손되고 없다.

석굴은 해원 대지진海原大地震과 문화대혁명 시기에 대규모 피해를 봤고 더불어 심각한 풍화와 도굴 손상까지 겪었다.

1982년, 전국 중점 문물 보호 단위가 됐다.

개착 연대는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현존하는 자료들을 통해 보면 북위 말기에 있었다고 본다. 

이곳은 과거 실크로드 중요한 성이 있던 곳이다.

서위西魏와 북주北周, 수당 시기에 큰 개착들이 있었다.

특히 당대에는 이 일대에 대규모 불교 사찰 경운사景云寺가 들어섰다.

송나라와 서하西夏 시기에 여러 변화가 있고 여러 사찰이 들어섰다.

이 시기에 티베트 불교가 전래했다.
 

 
명나라 때 경운사 근처에 삼중 누각이 세워지기도 했다.

정통 8년(1443년), 경운사를 다시 지으니 황제가 원광사圆光寺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그 인근에 상국사相国寺가 세워지기도 했다.

청나라 이후, 불교 세력이 점차 쇠퇴하면서 일부 불교 석굴이 도교 석굴로 변경되고 옥황각玉皇阁이 들어서기도 했다.

개조한 석굴은 현지인들에게 자손궁子孙宫이라고도 일컬었다.

석굴은 고원 현성县城에서 북서쪽으로 55km 떨어진 육반산六盘山 해발 약 1700미터에서 1850미터 사이에 위치한다.

육반산은 이 지역에서 자연 풍화와 빗물 침식으로 인해 여러 개 언덕으로 나뉘었고, 석굴은 이 언덕 남쪽과 동쪽에 굴착했으며, 분포 범위는 1,500여 미터에 달한다.

1986년 조사에서 132개 동굴 번호가 부여되고 산세를 따라 남쪽에서 북쪽으로 8개 구역으로 나뉘었다.

개중 1~5번 동굴은 '대불루구大佛楼区',

6~39번 동굴은 '자손궁구子孙宫区',

40~50번 동굴은 '원광사구圆光寺区',

51~103번 동굴은 '상국사구相国寺区',

104~108번 동굴은 '도화동구桃花洞区',

109~118번 동굴은 '송수와구松树洼区',

119~125호 동굴은 “삼개굴구三个窟区”,

126~132번 굴은 '흑석구구黑石沟区'가 부여되었다. 

좀 더 상세한 내용은 추후 정리하되,

원문을 일단 전재해 둔다. 


北魏
北魏时期的洞窟主要分布在子孙宫区的南面及中部,一共13个,其中4座为中心柱窟,9座为供僧尼居住修行的僧禅窟。北魏时期的礼拜窟规模并不大,中小型居多。窟的平面为方形,窟门上方有明窗,中心柱的四面均开凿有佛像。佛像的组合以一佛二菩萨为主,也有交脚弥勒、乘象、骑马、一佛二弟子的造像等。佛像的造型多为高肉髻、面相清秀、长颈削肩的造型,身着褒衣博带装,衣纹密集平行式阴线雕刻,大衣披覆龛下。菩萨的造型则多为头梳高髻、细颈削肩、身着襦裙、披巾在腹部前交叉。弟子则身着袈裟,拱手而立。4座礼拜窟中,22号和28号的中心柱已经塌毁,四壁没有龛像[4]:4;14号和24号窟保存较为完好[1]:91。

西魏
建于西魏时期的佛窟较多,但断代并不明确,均主要分布在大佛楼和子孙宫区一带,部分洞窟曾被定为至北魏时期[4]:4。根据不同的窟龛和造像的风格,可以将西魏的洞窟分为前后两期。前期风格与北魏相近,共有19个洞窟,其中17、32、33号洞窟为中心柱窟,17号和33号窟的中心柱已经被凿毁,32号窟保存较为完好;佛殿窟有7个,分别为2、8、18、19、20、34、35号窟,但均严重风化,以至于无法分辨原貌。后期有6座洞窟,这一时期的洞窟龛室主要为帐形龛,组合主要为一佛二菩萨式,佛像造型略宽,菩萨头戴花冠,身着袒裙,衣纹为直平阶梯型,线条简略粗疏。在这一批洞窟中,36和37号窟均为中心柱窟,但36号窟中心柱已经被凿毁,而37号窟中心柱没有完工。除主要洞窟外,在开凿于北魏时期的28号窟中出现了大量西魏时期的佛教造像[2]:9-10。 

北周
北周时期所开凿的洞窟主要集中在圆光寺区的崖壁上,共分为上下两层,其中47和48号窟在上层,其余在下层。这一时期的洞窟以礼拜窟为中心,僧禅窟围绕在礼拜窟的周围。僧禅窟以中心柱窟为主,窟内雕刻有梁架、角柱等仿木结构,中心柱柱身四角雕有立柱,下面雕刻有莲花柱础,柱子上方则雕刻有栌斗,栌斗承接中心柱顶部的梁架以及窟顶的斜枋。中心柱不分层,四面各开一龛。龛的造型以帐形为主,少量为尖楣圆拱龛。帐形龛的龛楣上雕刻有帐褶、莲花瓣、宝珠、璎珞等,两侧雕刻有下垂的流苏,流苏上端则由龙、凤、象等造像的嘴部衔住。尖楣圆拱龛的龛楣上有七佛的浮雕。所有龛的组合中,单铺一一佛二菩萨为主,更多的则是三佛、七佛的题材。在造像风格方面,佛像相比较起北魏、西魏的造像更加粗壮敦厚,面相较圆,面部表情较为严肃。而菩萨的造像则较为婉约[2]:10-11。

北周时期的洞窟中有45、46、47、48、51五处中心柱窟。受到北周武帝灭佛的影响,51号窟未能雕刻完成,而47和48号窟则仅仅雕刻出了窟龛的形状[2]:11,但在48号窟中出现了大量藏传佛教的壁画造像[6]。

隋代
由于隋代享国时间较短,须弥山石窟中在隋代所开凿的洞窟数量也并不多,中心柱窟仅有67号和70号两座,附属的僧禅窟围绕在中心柱窟旁。中心柱窟的主室为方形,窟内雕刻有仿木结构,窟顶为覆斗型,北面墙壁凿有1龛,东西两面各开3龛,中心柱的四角位置的仿木结构与北周时期的比起来较为简化。中心柱基座较高,柱身不分层,四面均有开龛。龛以帐形、尖拱形、圆拱形为主,其中帐形龛纹饰较为简单。造像组合以一佛二菩萨居多,主龛内也有一佛二弟子二菩萨组合。在造像风格方面,隋代的造像基本继承了北周的风格,但是在体型刻画方面更偏重写实,而且佛像的身体比例略有不协调[2]:15。

唐代
唐代时期的洞窟的数量在须弥山石窟当中是最多的,其中主要的洞窟包括1、5、52、53、54、62、64、69、71、72、75、76、77、78、79、80、82、83、86、87、88、89、90、105号等佛窟,其中5号窟为整个须弥山石窟最大的一座,高达20.6米,也被称作大佛楼。唐代的雕凿总共可分为三个时期[2]:17-19:

第一个时期在高宗永隆元年至武周如意元年(680-692年)时期,这个时期共雕凿了2个大像窟和3个礼拜窟,2座大像窟即为1号窟和5号窟(大佛楼),佛殿窟为77,78,79三座,主室为方形,窟顶为覆斗顶或者平顶,三面墙壁均建有佛坛。造像整体组合为三佛题材,造型风格偏丰满健壮,但是造型上略显僵硬。

第二个时期为武周如意元年至玄宗先天元年(682-712年),这个时期的礼拜窟有52、53、54、69、71、72、75、76、80、82、83、86、87、88、89号窟,有佛殿窟和涅槃窟两种,其中涅槃窟仅75号窟一座,窟内造像以释迦摩尼涅槃为题材,这一题材在全中国范围内的佛教石窟都非常罕见;佛殿窟与第一时期的窟较为类似,佛像的造型的僵硬感减弱。
第三个时期的佛窟大约为玄宗先天元年至代宗大历十四年(712-779年),这个时期的礼拜窟分为中心柱窟和佛殿窟两种,号码分别为62、64以及105窟。这一时期的佛龛除62号在造像内容上有较大不同之外,其他基本上延续了之前的形制。
明清
明清时期的洞窟主要位于松树洼区,以藏传佛教的瘞窟和禅窟为主[5]:179。

保护
1982年,须弥山石窟文物管理所成立。1984年,须弥山文物管理所陆续对重要洞窟及被破坏部分进行了抢险加固修缮,并根据窟前的建筑遗迹,修建了有保护性窟檐和防水雨篷,但这批雨雨篷在2007年时被检测出了裂缝,并且这些裂缝直接危害到了石窟的安全[13]。

2002年,须弥山文物管理所采用丙烯酸类保护材料进行了第一期防风化化学药物涂渗加固工程,这次工程减缓了一些重点洞窟石雕的风化速度,延长了洞窟的保存寿命。但由于开销过于巨大,此后的保护材料涂抹工作一直没能进行[9]。由于盗凿佛像的违法活动一度非常猖獗,石窟文物管理所被迫派遣专人在晚上对石窟进行看护[11]。由于所雕凿石窟所处的岩质很容易被风化,加之盗凿导致的严重破坏,2007年,须弥山石窟被列入美国世界历史遗迹保护基金会公布的2007-2008年“世界百大濒危文明遗址”名单当中[13],近年来由于风化作用,损毁加快,科学保护迫在眉睫[11]。

2009年,须弥山石窟文物管理所对石窟附近裸露出树根的古树在不伤及裸露出的树根的前提下加固了钢筋。过去的山路全部予以砌护,巡山道路全部铺了石条,电线全部掩埋到地下[14]。

2014年10月,中国城市建设研究院完成宁夏须弥山石窟风景名胜区总体规划编制任务,该景区是经国务院审定批准的第八批国家级风景名胜区,是宁夏回族自治区继西夏王陵风景名胜区之后的第二处国家级风景区[15]。2015年中华人民共和国全国人民代表大会期间,宁夏代表团正式提议将包括须弥山石窟在内的多处文物保护单位列入丝绸之路的世界文化遗产名录的扩充名单当中[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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