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의 스탠다드 Standard of Ur, 수수께끼 같은 수메르 나무상자
우르의 스탠다드 Standard of Ur? 라는 말이 붙었는데 이 경우 스탠다드가 뭔가?
암튼 참말로 요상한 유물로 기원전 2천년대 수메르 유물로, 현재 영국박물관 소장품이다.
폭 21.59cm, 길이 49.53cm 속이 빈 나무 상자다.
한데 조개껍데기, 붉은 석회암red limestone,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모자이크를 상감했다.
이 스탠다드는 이라크 나시리아Nasiriyah 서쪽에 위치한 고대 도시 우르Ur에서 출토되었다.
초기 왕조 시대 Early Dynastic period 우르 제1왕조 First Dynasty of Ur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약 4,600년 전 손님이다.
이는 아마도 속이 빈 나무 상자 형태로 제작되었을 것이며, 양쪽 면에는 정교하게 상감한 모자이크를 통해 전쟁과 평화의 장면을 표현한다.
발견자 울리는 스탠다드라 했지만 실제 용도는 모른다.
1927~28년 레너드 울리 경 Sir Leonard Woolley이 발굴한 우르 왕립 묘지에서 가장 큰 왕릉 중 하나인 PG 779 무덤 모서리에서 제물로 바친 남자 유골 옆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유골이 이 스탠다드를 든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이 유물을 기둥에 얹어 잡고 있었을 남자 어깨 바로 위에 놓여 있었다.
이 무덤은 기원전 2550년 무렵 사망한 우르-파빌사그Ur-Pabilsag 왕과 관련이 있지만 이미 고대에 약탈됐다.
박스는 발견 당시 파편화한 상태였다.
4천 년이 넘는 세월에 모자이크를 고정한 나무 틀과 역청 접착제가 부식되었다.
이를 고생해서 발굴한 사람들도 못할 짓이었다.
현재 형태는 당연 복원이다.
이를 기준으로 폭 21.59cm(8.50인치), 길이 49.53cm(19.50인치) 크기다.
상자는 불규칙한 모양이며, 양 끝은 잘린 삼각형 모양이고 아래쪽이 위쪽보다 더 넓다.
상감 모자이크 패널은 기단 양쪽 긴 면을 덮는다. 각 패널은 위쪽, 가운데, 아래쪽 세 칸에 걸쳐 일련의 장면을 표현한다.
두 개 모자이크는 각각 군사 작전과 연회 장면을 묘사한 주제 때문에 "전쟁"과 "평화"라는 별칭이 붙었다.
양쪽 끝 패널은 원래 환상적인 동물들을 묘사했지만, 매장 과정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가 나중에 복원되었다.
두 작품 모두 예술 형태를 묘사하는 데 계층적 비율을 사용했으며, 가장 중요한 인물이 덜 중요한 인물보다 더 크게 표현되었다.
"전쟁"은 수메르 군대가 국경 분쟁border skirmish과 그 여파에 휘말린 모습을 묘사한 가장 초기 작품 중 하나다.
이 "전쟁" 패널은 상단 등록부egister 중앙에 왕이 서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다른 어떤 인물보다 키가 크고, 머리는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있어 그의 최고 지위를 강조하는데, 이는 다른 패널에서도 사용되는 장치다.
그는 경호원과 네 바퀴 수레 앞에 서 있는데, 마차는 야생마나 가축 당나귀가 끌었을 것이다.
말은 중앙아시아에서 수입된 후 기원전 1천년대에댜 도입되었다.
그는 포로들을 마주 보는데, 이들은 모두 벌거벗고 묶였으며 가슴과 허벅지에 피를 흘리는 큰 상처를 안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는 패배와 굴욕을 상징하는 장치다.
중간 등록부에는 거의 동일하게 묘사된 여덟 병사의 전투 장면으로 전환되고, 이어서 적들이 포로로 잡혀 끌려가는 모습이 묘사된다.
군인들은 가죽 망토와 헬멧을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모자이크에 묘사된 것과 같은 종류의 헬멧이 실제로 같은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포로와 죽은 적의 나체는 그들이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보였는지 문자 그대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며, 죽음을 나체와 연결시키는 메소포타미아 신앙과 관련된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래쪽 register에는 네 대 수레가 묘사되는데, 각 수레에는 마부와 전사(창이나 도끼를 든)가 탔고,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equids가 그려졌다.
수레는 상당히 상세하게 묘사된다.
각 수레에는 견고한 바퀴가 달렸고(살이 달린 바퀴는 기원전 1800년 무렵에 발명), 앞쪽 공간에는 여분의 창spare spears이 실렸다.
마차 고삐 배열 또한 상세하게 묘사되어 수메르인들이 재갈을 사용하지 않고 수레를 어떻게 조종했는지를 보여준다.
재갈은 기원전 천년 대에야 도입되었다.
마차 장면은 동물들 걸음걸이 묘사를 통해 움직임과 행동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개된다.
첫 번째 마차는 걷고, 두 번째 마차는 구보로, 세 번째 마차는 질주하고, 네 번째 마차는 뒷발로 일어서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짓밟힌 적들은 뒤 세 마차 무리 발굽 아래에 깔렸다.
"평화" 패널은 연회 장면을 묘사한다.
왕은 다시 위쪽 register에서 왼쪽 조각된 의자에 앉아 있다.
앞에는 오른손에 잔을 든 여섯 다른 참석자가 앉았다.
이들을 따라다니는 인물 중에는 장발의 사람, 아마도 가수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리라 주자를 수반한다.
가운데 레지스터에는 프린지가 달린 치마 입은 대머리 인물들이 동물, 생선, 그리고 다른 물건들을 든 모습인데, 아마도 잔치에 가져오는 모습일 것이다.
아래쪽 레지스터에는 위쪽 인물들과는 다른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을 한 일련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어깨에 메는 가방이나 배낭에 농산물을 싣거나, 코걸이에 묶은 밧줄로 수레equids 를 끈다.
이 스탠다드 기능은 현재로서는 분명하지 않다.
울리의 제안은 가능성 없고 악기의 공명통이었을 추측도 있다.
파올라 빌라니(Paola Villani)는 이 박스가 전쟁 자금이나 시민 및 종교 활동을 위한 자금을 보관하는 상자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또한 미심쩍다.
측면 모자이크는 "전쟁"과 "평화"라 했지만 실제는 전투 후 승리 축하로 이어지는 단일 서사일 가능성이 있다.
이는 수메르인들이 사용했던 메리즘(merism)이라는 문학적 기법과 시각적으로 유사하다.
메리즘은 상반되는 개념들을 결합하여 상황 전체를 묘사했다.
수메르 통치자는 루갈lugal(문자 그대로는 "위대한 인물" 또는 전쟁 지도자)과 엔en(신들과 중재하고 땅의 풍요로움을 유지하는 시민/종교 지도자)이라는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겨졌다.
이 박스통은 수메르 왕권의 이 두 가지 상호 보완적인 개념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모자이크에 묘사된 장면들은 "기병대"가 발견된 무덤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시종과 악사들 유골은 왕들의 유해와 함께 발견되었고, 모자이크의 "전쟁"과 "평화" 장면에 사용된 장비들도 함께 발견되었다.
고대 이집트 무덤과는 달리, 시신은 음식이나 서빙 도구와 함께 매장되지 않았다.
대신 빈 음식 그릇이나 동물 뼈와 같은 식사 잔해가 함께 발견되었다.
그들은 마지막 의식 잔치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잔해는 사후 세계에서 주인과 동행하기 위해 (아마도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처형되기 전에 함께 매장되었을 것이다.
이상은 해당 위키 영문판을 거의 전문 번역했다.
중복은 과감히 삭제 통합했다.